제1절 유래(由來)

     

    1. 유래문(由來文)

     

    錄淸州郭氏由來

    唐玄宗時起安祿山之亂汾陽王之孫奉使東渡

    此時玄宗讓位于肅宗隱居於蜀之山間送無聊歲月

    天寶十五載丙申新羅景德王送慰安使

    同年玄宗感其厚誼親製十韻詩手札送回禮使選能詩者

    此時選定人唐代一等功臣郭子儀之孫名不傳

    以特使盡其所任歸國時念其黃金新羅

    留其子一人西原小京

    詩載東國通鑑有使去傳風敎之句

    此卽淸州郭氏姓貫之始

    而世代玄遠先祖名佚不傳後有侍中諱祥

    事憲康王能文章

    卽新羅憲康王朝侍中祥公吾淸州郭氏始祖是也

    三十四世孫三嘉派魯然編述

     

    청주곽씨 유래를 기록한다.

    당나라 현종 때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분양왕(곽자의)의 손자가 사신으로 신라에왔다. 이 때 현종은 숙종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촉(蜀) 땅 산가벽지로 숨어들어 무료하게 지내고 있었다.

    서기756년(천보15년 병신년)에 신라 경덕왕이 현종을 위로할 사신을 보냈더니 이해 현종은 그 후의에 감사하여 직접 10운시를 짓고 손수 편지를 써서 시(詩) 잘 짓는 사람을 뽑아 회례사로 보내게 된다.

    이 때 뽑힌 사람이 당나라시대 일등공신인 곽자의의 손자였는데 그 이름은 전하지않는다.

     

    이 특사가 그 소임을 다하고 되돌아 갈 때 그가 신라가 황금의 나라라고 생각하여 그의 아들 하나를 서원소경에 살게 하였다.(註:이 시대는 서기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으로추정). 使去傳風敎(사거전풍교:사신이 세상의 풍습을 전하고 갔다.)라는 시의 구절이 동국통감에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가 곧 청주곽씨의 성과 관향의 시작이다.

    그 후 세대가 멀고아득하여 선조의 이름은 잃어버려 전해오지 못하다가 후세에 시중이신 상(祥)이 신라 의 헌강왕을 섬겼는데 문장이 능했다. 즉 신라 헌강왕조 시중 상(祥)공이 우리 청주곽 씨 시조(始祖)이시다.

    34세손 삼가파 노연이 자료를 모아 기록하였다.

     

       청주곽씨(淸州郭氏)의 유래(由來)와 사실(史實)

     

    고려의 閥族 淸州郭氏는 중국에서 移民 온 성씨임이 정설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도 곽씨는 우리나라의 金ㆍ李ㆍ朴과 같이 그 姓勢가 큰 씨족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곽씨는 周나라 文王의 막내 동생 괵숙(虢叔)에서 그 유래를 말한다고 하나 너무도 가마득한 옛일이라 考證할 수가 없는 것이다.

     

    唐나라 때 전란을 피해 신라로 건너온 성씨가 비단 곽씨만은 아닐 것이다. 신라에 처음 건너온 곽씨는 곽자의(郭子儀)의 후손이다. 곽자의는 당 玄宗 때인 서기 756년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一等功臣이다.

    현종은 전란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아들에게 帝位를 물려주고 蜀나라의 산간벽지에 숨어살 때 신라의 景德王(재위 742-765년) 16년인 서기 757년에 왕이 사신을 보내 현종을 위로하니 당나라 조정은 그 후의에 답례로 특사를 파견하여 감사의 뜻을 전해오게 된다. 이 때 특사로 곽자의의 손자가 선발되어 東行길에 오를 때 어린 아들을 되리고와서 아들은 남겨두고 돌아갔는데 그 아들의 자손이 곧 청주곽씨의 선조가 되었다.

    그러나 경덕왕 때에 신라에 남았던 이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그로부터 120여년이 지난 신라 49대 憲康王(재위 875-886년)朝 에 상(祥)字 할아버지가 侍中(종1품)을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祥公은 文章과 詩를 잘 지어 德望이 높았으며 당대의 碩學 孤雲 崔致遠과도 交遊한 것으로 문헌록은 기록하고 있다.

     

    중국에서 귀국한 고운은 헌강왕 10년인 서기 885년에 나이 29살에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라는 職에 임명되어 출사하였는데 당시 祥公은 侍中에 在職 中이거나 시중을 그만 두고 은퇴해 있거나 했을 때이므로 公의 연치는 50중반에서 60종반 사이로 보아야할 것이다. 이러한 나이 차이에도 서로 交遊한 것은 미루어 짐작컨대

     

    첫째. 조정에 출사한 孤雲과 侍中인 公이 자주 정사를 논의함에 따라 서로 의기가 투합하였을 것이며,

    둘째. 당시 신라 조정은 이미 혼란상태의 연속이라 그 끝이 보이지 않자 고운은 조정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名士들과 交遊할 때 이미 은퇴해 있는 당대 大文章家 祥公과도 만나 나라를 걱정하고 그 분노를 문장으로 주고받으면서 연치(年齒)를 뛰어넘는 友情을 나누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 族譜에는 청주곽씨의 始祖가 祥公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신라 경덕왕 16년 서기 757년 이후부터 곽자의 증손자가 신라에 정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최초로 정착한 이와 祥公과는 120여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신라에는 이름만은 전해지지 않으나 곽씨가 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부문은 硏究의 對象이니 後學들에게 그 짐을 맡기지 않을 수 없다.(34世孫三嘉派魯然謹述) <경암 한소(敬菴 漢紹)공은 상당전에 다음과 같이 청주곽씨의 유래를 기록하고 있다> 곽씨는 본래 주씨와 같이 득성하였으며 그 선조는 왕계의 아들 괵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대개 괵(虢)과 곽(郭)은 같이 불렀음으로 그 묘예(苗裔)(자손)들이 군후로 책봉됨에 따라 그곳을 姓으로 하였다고 채백개가 지은 유도비문에 실려있다.

     

    당의 현종 천보(당 현종 15년 병신년인 756년)에 신라 경덕왕이 사신을 보내어 홀로 촉에 피난가 있는 황제에게 조회하니 황제가 가상히 여겨 친히 십운시를 짓고 손수 편지를 써서 시를 잘하는 사람을 뽑아 사신으로 신라왕에게 보내도록 명하였는데 분양왕의 손자가 뽑혀 그 소임을 맡아 같이 우리나라에 와서 데리고 온 그의 아들을 서원(현재의 청주) 소경에 살게 하였다.

     

    동국통감에 사거전풍교(사신이 풍교를 전하고 갔다)라는 시구가 실려 있으니 이가 곧 우리 청주곽씨의 성(姓)과 관향(貫鄕)의 시작이고 그 후에 세대가 멀어 이름을 잃어버려 전해오지 못하였다. 

    후세에 시중을 지낸 휘 상(祥)께서 헌강왕을 섬겼고 문장에 능하여 문창후 최치원과 좋은 벗이었다.

     

    <선대 조상님들에 대한 사실(史實)>

    4세손 중시조 곽원(郭元, 970년경 출생-1029별세) 할아버지는 고려 성종 때 서기 996년 문과급제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 종5품)을 시작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 형부상서(刑部尙書: 정3품 벼슬. 법무부 장관) 참지정사(參知政事, 종2품)를 지냈으며 시호가 문성공(文成公)이시며 고려사열전의 기록에는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성청렴 性淸廉), 문사가 뛰어 났으며(공문사 工文詞), 관리로서 능력이 탁월하다(이이능 以吏能)”고 評하였다.

     

    5세손은문성공의 아들 증(拯)공이다. 공이 문과급제하자 국왕 덕종이 그의 아버지 문성공의 공훈으로 발탁하여 중용하였다.

    6세손은 증공의 아들인 상(尙, 1034-1105)으로 형부상서(刑部尙書), 참지정사(參知政事: 고려 중서문하성의 종2품 벼슬)에 오른 숙종의 스승으로서, 왕의 총애가 두터웠고 전하며, 중신들 간에 명성이 좋았다고 한다. 공이 1103년 숙종 8년에 정1품 수사공(守司空)인 政丞의 반열에 있었으나 청렴(淸廉)하였다. 

     

    고려사에 보면 “郭尙은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하여 별다른 재주는 없으나 평생 生産에 일삼지 않아 남은 자산(資産)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호는 순현공(順顯公)이다. 순현공은 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큰 아들 탄(坦)공은 과거에 급제하여 예부원외랑이 되어 언제나 추울 때와 더운 장마철에 간장과 죽을 늘 장만해 두고 배고픈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시호가 문충(文忠)으로 그의 명성이 높았으며, 둘째 아들 여(輿,1058-1130)는 예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여(輿)공은 과거에 급제하여 궁내에 배속되어 閤門祗侯(합문지후)로 있다가 洪州牧使(홍주목사)를 거쳐 禮部員外郞(예부원외랑)에 올랐으나 얼마 후에 벼슬을 버리고 金州(금주)로 은거하여 자연에 귀의하게 된다.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에 의하면 “공은 어렸을 적에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름을 輿라고 하라”고 하자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꿈에서 얻은 이름 「輿」자는 「수레」라는 뜻이 있다. 이 수레(여)는 사람들이 떠메고 다니는 王者(왕이 될 사람 또는 왕)의 수레 또는 왕자와 함께 타는 수레를 의미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은 고려 16대 예종과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초월(超越)한 심교(深交)를 한 예종의 사부(師父)였다. 고려사 열전에 예종이 동궁(東宮:왕세자)으로 있을 때부터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낸 공을 사모하였는데 왕으로 등극하자 공을 불러 궁중(순복전純福殿)에서 학창의(鶴氅衣)와 오건(烏巾)의 道士차림으로 왕의 左右를 떠나지 못하게 하니 사람들이 금문우객(金門羽客:왕궁 안에 있는 신선)이라 불렀다.

     

    임금 예종은 공이 혹이라도 宮 밖으로 나아갈까 염려되어 궁 안에 별장을 하사하여 거처케 하였으나 공이 궁 밖에 살기를 극구 청(請)하니 왕은 약두산(若頭山)의 한 봉우리를 하사하고 집을 지어 살도록 허락하였다. 

    이에 공은 집을 짓고는 스스로 아호를 동산처사(東山處士)라 하고, 당호(堂號)를 허정당(虛靜堂), 서재를 양지재(養志齋)라 지으니 임금이 현판(懸板)을 하사하였다고 고려사 열전에 기록이 전한다. 

    시호는 진정(眞靜)이며 후사가 없다.

     

    7세손 문충공 탄(坦)은 동약(東若) 동순(東珣) 아들 둘을 두었는데 둘 다 문과급제한 다음 동약(東若)공은 액정내알(掖庭內謁)을 역임하였고 동순(東珣)공은 진정공(鎭靜公)의 행적을 이어 국왕의 총애를 받아 비서감(秘書監)에 재직하면서 수많은 왕의 교지를 지었는데 교지의 많은 편이 고려사에 전한다. 

     

    공에 대한 기록은 1144년 秘書監에 있었다는 것을 끝으로 그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다. 추정하건대 65-66세를 전후한 1150년경에 돌아가셨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공은 문장이 탁월하고 왕의 비서이었기에 왕(예종과 인종)의 表(표)나 文書(문서)를 많이 지어 대내외에 공표하였다.순현공·진정공·비서감까지 일문삼세(一門三世)가 임금의 총애를 받으니 당시 곽씨(郭氏)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고려의 벌족(閥族)에 이르게 된다.

     

    8세손 액정내알 동약(東若)공의 아들 기(琦)는 출생하여 문과급제한 후 태자첨사를 역임하고 시중에 올랐으며 시호는 문간이다.

    9세손 문간의 아들 부(垺)는 문과급제한 후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역임하고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올랐으며 맑고 곧아 거친 음식으로 생활하며 여유를 원하지 아니하였다.

    10세손 문하평장사 부(垺)공이 외아들 두니 예(預, 1232-1286)이다.

    11세손 예(預)공이 태어난 해는 고종이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겨간 때이다. 실로 공은 전란 중에 어렵사리 태어난 것이다. 

    공은 四門博士(정8품)이신 아버지 浮와 兵部尙書(정3품) 金浚의 손녀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병부상서 김준(개명전 김인준)은 1258년 유경, 임연등과 함께 삼별초의 힘을 빌어 최의를 살해한 인물로서 제24대 원종 임금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268년에 아들 김주와 함께 살해된 김준은 무신정권의 최후의 우두머리였고 김준의 죽음이 무신정권의 종지부를 내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공의 초명은 王府, 자는 先甲이라 하였으며 공은 竹山朴氏 朴哄의 딸과 혼인하여 2남(雲龍과 雲鎭)과 2녀를 둔다. 공은 23세 되던 해인 1255년(고종42년) 과거에 장원(1등)으로 급제하여 全州司祿에 임명되었다. 

    고종조에서는 이렇다 할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공의 나이 29세인 1260년(원종 원년)에 詹事府 綠事로 전입되어 內園署令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이때는 고려의 서울이 아직 강화도에 있었다. 내직에 근무하면서 공은 고려의 자주적 정치활동이 보장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공의 가슴속에는 민족주의 정신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시기였을 것이다.

     

    공은 대대로 文臣 가문의 자손으로서 무신의 橫暴와 無道를 저주하였을 것이고 힘이 없음을 한탄하였으리라. 공의 성품이 내성적이나 다정하고 다감하였으며 이러한 성품이 文章과 書藝를 잘하게 되었으리라 본다. 元 세조 쿠빌라이의 신임이 두터웠던 원종이 즉위한 초기에는 원의 간섭이 다소 약화되기 하였지만 반면 왜구의 出沒은 빈번하여 남해안 백성의 곤란이 말이 아니었다. 1263년 2월에 왜구가 김해를 침입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주민을 납치해 가자 고려조정은 使臣을 왜국에 파견하게 된다. 

     

    공의 나이 32살에 홍저(정 6품)와 함께 和親牒을 가지고 왜구에 납치된 주민을 송환함을 목적으로 파견되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으며 원종조에는 지금의 외무부에 해당하는 禮賓主簿兼直翰林院에 오르게 된다.

    제25대 충렬왕이 1274년 왕으로 오르자 왕은 공을 版圖正郞(정5품)으로 특별 기용하고, 고려조에 儒學을 진흥시키는 중책을 명령하여 寶文署待制 知制誥에 임용하였다. 그 후로 內侍佐郞(정5품), 國子監司業(종4품)으로 승차하였다.

     

    공의 나이 48세 때에 右副承旨 재직시 경상도에 가축의 전염병이 창궐하여 농경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소가 수없이 죽는 일이 자주 있었다. 소의 수가 적어지고 특히 항몽전쟁을 거치는 동안에 소와 말이 줄어들어 農民經濟가 실로 어렵게 되자 畜牛의 감소를 방지키 위하여 牛馬屠殺禁止法을 건의하여 실시케 하였다.

    다시 同知貢擧에 제수되었으나 상사보다 품계가 높다하여 사양하니 뭇사람의 칭송이 높았다. 특히 공이 과거 考試官으로 있을 때 승려 조영의 “날치기 인사집행”을 사전에 차단하여 권력자의 인사전형을 막아 공정한 인사운용을 하였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좌부승지(정3품), 國子監大司成, 文翰學士에 올라 오늘날의 인적자원부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어느 시대이건 조국에 해를 입히는 자가 있었다고 하던가. 당시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홍다구는 개인적 원한으로 고려조정을 괴롭힌 인물이다. 홍다구는 쿠빌라이에서 고려가 왜국과 相通한다고 하여 왜국 정벌을 주도하게 된다. 

     

    왜국 정벌은 여원연합군에 의해 1차(1237년)에 4만 병력과 9백여 척의 전함으로 출발하였고, 2차(1281년)에는 15만 병력이 나아갔으나 원군은 겨우 3명이 살았을 뿐 모두 몰살되었으며 고려군은 당시 김방경 장군의 뛰어난 통솔로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공은 여원연합군의 대패와 비참하게 죽어간 군사들을 생각하여 마음이 아파 “바다 건너감을 슬퍼함”이라고 하는 感渡海를 지어 조국의 원수 홍다구 일당을 痛烈하게 비판 공격하였다. 공의 나이 55세(1286년, 충렬왕 12년)에 知密直司事 監察大夫로 영진되어 政丞의 반열에 오른다. 감찰대부로 승차된 그 해 몽고국의 聖節을 축하하기 위하여 賀聖節使로 공이 원나라에 대사로 가게 된다. 공은 본디 성품이 강직하고 원의 복속국이란 치욕적인 국가 위치에 울분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이 敵國 성절 축하사절 대표가 되었으니 마음의 病이 深化되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밀직사란 왕의 명령을 대행하여 출납과 군기 등의 업무를 관장하는 곳이라, 이곳의 우두머리인 공의 公評正大한 업무처리로 볼 때 원나라 벼슬아치들에게 줄 뇌물을 준비하지 않았을 것임은 자명하다.

     

    일찍이 공은 감도해란 시로 민족의 원수 홍다구 일당을 비판한 적이 있었는데 원에 가면 이들의 보복이 있을 것을 모를리 없는 공은 원국 가는 길이 험난하리라 고심하였을 것이다. 원에서 홍다구 무리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고 부탁과 애걸을 하여야 할 것을 생각하니 憤痛이 터질 일이다. 공은 자신이 예측한 대로 원나라 가는 도중에 맘의 病이 심화되어 향년 55세로 絶命하고 만다. 

     

    아! 어찌 슬프고 분하지 않으리오. 공의 죽음에 대한 이견이 여러 가지이나 조국을 반역한 無道들의 치밀한 훼방이 어찌 없었겠는가! 공은 이러한 훼방의 산물로 분을 삭이지 못하고 타국에서 그 命을 다하였거나, 타인에 의한 殺害 등도 있었을 것임이 미루어 짐작이 간다.

     

    연담공이 일찍이 한림원에 있을 때 비속에서 발을 맨발로 우산을 들고 혼자 걸어 용화지에 이르러 연꽃을 감상하니 후세 사람들이 그 풍치를 고상하게 여겨 졸재 최해와 목은 이색 등 여러분이 그의 시를 차운하여 사실을 읊었다. 그 시문이 기아 청구풍아와 동문선에 실려 있고 사적은 고려사와 고려사열전 및 여러 사기에 상세히 전해온다. 공은 逝去한 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안장되었다가 지금의 청주시 명암동 약수터 후편에 이장하여 崇尙의 큰 인물로 現存하고 있다.

     

    12세손 운용(雲龍)과 운진(雲鎭)은 지밀직사사 연담공 예(預) 할아버지는 두 아들이다. 장남 운룡은 봉선대부(奉善大夫) 의정부도진장(議政府都津長)이며 차남 운진(초명 鎭一)이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었으나 뒤에 임연이란 자가 나라를 어지럽히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서 불교에 의탁하여 명철을 보전하게 된다. 비로소 이 형제에 이르러 청주 곽씨 문중은 양파(兩派)로 분파하게 된다.

     

    13세손 연준(延俊, 초명은 迎俊)은 도진장 운용공의 아들로 문과급제하여 벼슬이 광정대부 판개성부사, 전법판서(典法判書: 고려 때 형조의 예전이름. 장관)를 역임하였는데 최득평의 아들 완산군 재(宰)와 같은 조정에서 대부가 되고 함께 뛰어난 공적이 있어 사적이 목은집에 나타나있다. 시호가 충헌공(忠憲公)으로 충정왕 2년에 그가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다.

     

    연준공 아우 교서랑 운진공의 아들이 린(麟)은 충렬왕10년 1284년에 장원급제하였고 임진년에 직문한서에서 공역서령으로 승진되었으며 서장관이 되어 선유사 김유성과 함께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절의로 목숨을 바쳐 돌아오지 못하였다. 고려조정은 국가를 위하여 殉職한 공의 공로를 받들어 유족에게 청주 추동에 밭(전답)을 하사하였다. 

     

    일본에다 장사지낸 공의 묘소에 풀이 고려가 있는 서쪽으로 쏠려 자라니 죽어서도 고국을 잊지 못하는 충직함과 문장이 세상을 진동하였으니 그 사적이 고려사와 고려사열전 등 여러 사기에 실려 전하고 있다.충헌공 연준이 아들 둘을 낳으니 

    14세손으로 장남은 운이고 벼슬은 밀직제학이며 사적은 고려사에 실려 있고 시는 기아에 들어 있다. 

     

    부인은 강화최씨고 감찰어사 계진의 따님이며 이남을 두니 장남 선은 판사고 차남 부는 공민왕 무신년에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도은 이숭인이 애사를 지었는데 그 중에 수문지하랑(修文地下郞)(애사에 글을 잘하여 땅속에서도 낭관이 되었다)라는 글귀가 기아에 실려 있다. 

     

    밀직제학공운공의 아우는 침(琛)이고 태중대부·상서·좌정승을 역임하고 문하판사,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으며 부인은 청주 정씨고 판도판서 이의 따님이며 찬성 장경공 해의 손녀이며 사실이 목은집과 장씨가전에 실려 있고 공의 매서 고성인 평재 문경공 이강은 청렴으로 유명하고 용재 양헌공 이원이 곧 그 아들이다.

     

    15세손 추(樞)공은 평장사 침의 아들이다. 

    추(樞)공은 공민왕 9년 1360년에 포은 정몽주 석탄 이존오와 동시에 급제하였는데 공은 포은보다 한 살 아래였으나 같이 공부하여 같이 과거에 뽑혔으니 서로의 정리(情理)가 매우 두터웠다. 

    공이 일찍이 한림원에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포은이 지은 송별시(送別詩)에 『곽군은 한스승 밑에서 공부한 벗으로(郭君同門人) 이제 다행히 같은 반열에 섰고(今幸又同列) 상주고 벌주는 일을 관장하면서도(手操褒誅筆) 높은 절조를 꺾을 수 없었다(高節不可折) 어제는 같이 남쪽에서 오더니(昨自南方來) 이제다시 수레를 돌려 돌아가는구려(今還改車轍) 세모에 나 혼자 남아 처져(歲暮獨淹留) 서로 만난 지 일순간 뿐 임을 한탄해 보네(相從嗟一瞥) 햇빛도 슬퍼서 빛을 잃었고(白日慘不輝) 음산한 구름만 빈틈없이 뒤덮였네(陰雲擁無缺) 어느 제나 봄바람 부는 마당에서(何時春風場) 서로 만나 이별없이 지내볼까나(會合無離別) 수레를 나란히 하고 먼 길 같이 가니(倂駕同長途) 가슴 속을 그대와 함께 털어 놓았으면(胸中共君說) 그대 돌아가면 무슨 소식 전하려나(君歸有何書) 특별한 글을 꿰매어 둠이 없으리(特書無緝綴)』라 하였다. 예문관 제학을 역임하고 단성보리(端誠輔理)공신에 참록되었으며 상당군(上黨君)에 책봉되었다. 

     

    포은이 살해되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두문동으로 동지들과 같이 은거하니 조선의 태조 태종이 찬성의 벼슬로 여러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1405년 태종5년 칠월 칠일에 장단 십천교에서 임종하시니 임금이 근신을 보내 제사지내고 문량(文良)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장단의 초지곡에 장사지냈다. 

     

    공께서 일찍이 지신사로 시험을 관장할 때 정희 등 구십구인을 채용하였다. 이 사실이 고려사 백문보전 현릉비명 고려절신록 등 여러 사료에 쓰여 있으며 면암 최익현이 전기를 지어 포양하였다. 전부인은 안동권씨 전공판서 엄의 따님이고 후부인은 여흥민씨 서한당 변의 따님이시다. 장원공 린은 아들 둘을 두었다. 큰아들은 지태(之泰)는 

    14세손으로 판도정랑이며 나이 칠십이 되어서도 효성이 지극하여 슬픔과 사모가 더욱 깊었다. 김해 부원군 허유전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아들 충수(忠秀)를 출생하니 급제하였고

    목은 이색과는 동갑 벗이었고 늘 원통하고 슬픈 의기가 있었다. 잠시 간관(諫官)인 대성을 역임하면서 원송수와 함께 정천기를 탄핵하여 사헌부에서 그를 취조할 때 법(法)과 풍기(風紀)를 떨쳤다.

     

    1352년 공민왕 원년에 바른말을 한 것 때문에 벼슬이 파직되고 외딴 섬으로 귀양을 갔으며 1361년 홍건적 난리 중에는 형부시랑인 공이 왕을 남쪽으로 호종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통헌대부에 올랐다. 장원공을 추모하여 추동(楸洞)에 정자를 세우고 이름을 영모(永慕)라 하여 아버지 산소가 있는 동쪽 일본 땅을 바라보는 생각과 충효의 큰 절의를 담아 세상에 모범이 되게 한 사적이 고려사와 목은의 기문과 유항 한수, 양촌 권근의 현판 시에 들어나 있다. 

     

    불행하게도 후사가 없어 정랑공의 아우 우태(又泰)의 아들을 입적시켜 대를 잇게 하였으며 그 후손이 함창에 살고 있고 사적이 단곡 곽진이 지은 퇴천공 존중(存中)의 묘지에 실려 있다.청주곽씨 15세손까지 그대가 겨우겨우 이어온 것으로 우리 족보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양파로 나누어져 큰집은 15세손 상당군 문량공 추(樞)공과 삼종간인 장원공(린<麟>) 손자 사복경(司僕卿) 식(軾)을 이르는 것이다. 문량공은 아들을 4형제를 두었으며 장자 소경공 순(恂)은 아들 넷을 두어 그 후손이 21개 파를 이루었고 둘째 병사공 횡(忄弘 )의 후손에서 4개파, 셋째 좌승지공 휘(煇)는 단일파로 이어졌고 넷째 운(惲)으로 운(惲)이 비로서 조선조정에 나아가 가정대부 동지돈녕부사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 17세손 직장공 영(永)공이 경남 합천군 대병면 병목동으로 이거하여 살았으며 그때부터 후손이 합천 거창 파주 영암 여주 연기 천안 목천 예산 등지로 그대를 이어 20개 파를 형성하였다. 장원공 손자 사복경도 아들 셋을 두어 그 후손들이 7개 파를 이루어 상주 함창인근에 집성을 이루고 있다.

     

    사무총장 고지: 16세손 이후의 대강의 기록만 전하고 상세한 기록은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정리하여 발표할 것임을 알리오니 양해바랍니다. 사무총장 노연 청주곽씨(淸州郭氏)는 조선시대에도 의(義)를 실천하여 대대로 인물이 전래하였다.

    곽해룡(郭海龍)은 고려 우왕 10년에 중랑장(中郞將: 정5품 벼슬)으로 임금에게 건의하여, 무예도감(武藝都監: 궁궐문 옆에서 숙직하며 호위하는 일을 맡아보던 무사)을 설치케 했으며, 조선 개국 후 태조 2년에 주문사(奏聞使: 주청사, 중국에 주청할 일이 있을 때 보내던 벼슬)의 통역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태종 때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군기감의 종3품 으뜸 벼슬)에 이르렀다.

     

    곽존중은 태조 5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정종과 태종, 세종 4대 임금을 모셨으며, 세종 때 도승지(都承旨: 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으로 왕의 비서실장)을 역임하고, 성절사(聖節使: 중국 황제, 황후의 생일 축하 사신)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곽충보(郭忠輔)는 우왕 9년에 병마사(兵馬使: 종2품 벼슬로 각 지방의 병마를 지휘하던 무관, 절도사. 병사)로 왜구를 물리쳤으며, 서기 1388년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데 공을 세웠다. 조선개국 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왕명의 출납과 궁중의 숙위 등을 맡아보던 중추원의 종2품 벼슬)를 거쳐, 도총제(都摠制: 오위도총부에서 군무를 총괄하던 최고 군직)에 이르렀다.

     

    곽열(郭說)은 선조 34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전적(典籍: 성균관의 정6품 벼슬)을 지냈는데, 외숙인 김자점이 권세를 남용하자, 간언(諫言)을 하였으나 듣지 않자, 병을 핑계삼아 원주로 내려갔다.

    이밖에 청주곽씨 인물로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곽수인(郭守仁), 곽희검(郭希儉), 곽수지(郭守智) 등이 있다. 곽시징(郭始徵)은 집의(執義: 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3품 벼슬)를 역임한 곽지흠(郭之欽)의 아들로,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의 천거로, 참봉(參奉: 종9품)이 되었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퇴직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근대의 인물로는 3.1운동에 참가한 후 만주로 망명한 곽재려(郭在驪)가 있다. 그는 김원봉(金元鳳)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1920년 국내에 들어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가 체포되어 6년간 복역하기도 하였다. 

     

    그는 1963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단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單章)이 수여되었다.

    청주곽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에 14명, 사마시(司馬試: 생원, 진사를 뽑던 과거)에 25명, 역과에 1명 등, 모두 40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청주곽씨(淸州郭氏) 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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