郭預(곽예 11世)할아버지 詩(시) 賞蓮(상련/연꽃 감상)

     

    1. 詩 全文鑑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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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公의 일생

    公이 태어난 1234년은 고려 고종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겨간 때이다. 실로 공은 전란 중에 어렵사리 태어난 것이다. 공은 四門博士이신 아버지 浮(부)와 兵部尙書金浚의 손녀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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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담공예_영정                                                 연담공예_현판

     

    공의 초명은 王府, 자는 先甲이다. 공은 竹山朴氏 朴哄의 딸과 혼인하여 2남(雲龍과 雲鎭)과 2녀를 둔다. 공은 23세 되던 해인 1255년(고종42년) 과거에 장원(1등)으로 급제하여 全州司祿에 임명되었다.

    고종조에서는 이렇다 할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공의 나이 29세인 1260년(원종 원년)에 詹事府 綠事로 전입되어 內園署令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이때는 고려의 서울이 아직 강화도에 있었다.

     

    내직에 근무하면서 공은 고려의 자주적 정치활동이 보장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공의 가슴속에는 민족주의 정신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시기였을 것이다.

    공은 대대로 文臣 가문의 자손으로서 무신의 橫暴와 無道를 저주하였을 것이고 힘이 없음을 한탄하였으리라. 공의 성품이 내성적이나 다정하고 다감하였으며 이러한 성품이 文章과 書藝를 잘하게 되었으리라 본다.元(몽고)세조 쿠빌라이의 신임이 두터웠던 원종이 즉위한 초기에는 원의 간섭이 다소 약화되기 하였지만 반면 왜구의 出沒은 빈번하여 남해안 백성의 곤란이 말이 아니었다.

     

    1263년 2월에 왜구가 김해를 침입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주민을 납치해 가자 조정은 使臣을 왜국에 파견하게 된다. 공의 나이 32살에 홍저와 함께 和親牒을 가지고 왜구에 납치된 주민송환을 목적으로 파견되어 목적을 달성하였으며 원종조에는 지금의 외무부에 해당하는 禮賓主簿兼直翰林院에 오르게 된다.

     

    제25대 충렬왕이 1274년 왕으로 오르자 왕은 공을 版圖正郞(정5품)으로 특별 기용하고, 고려조에 儒學을 진흥시키는 중책을 명령하여 寶文署待制 知制誥에 임용하였다.

    그 후로 內侍佐郞(정5품), 國子監司業(종4품)으로 승차하였다. 공의 나이 48세 때에 右副承旨 재직시 경상도에 가축의 전염병이 창궐하여 농경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소가 수없이 죽는 일이 자주 있었다. 소의 수가 적어지고 특히 항몽전쟁을 거치는 동안에 소와 말이 줄어들어 農民經濟가 실로 어렵게 되자 畜牛의 감소를 방지키 위하여 牛馬屠殺禁止法을 건의하여 실시케 하였다.이 때에 공은 同知貢擧에 제수되었으나 상사보다 품계가 높다하여 사양하니 뭇사람의 칭송이 높았다.

     

    특히 공이 과거 考試官으로 있을 때 승려 조영의 “날치기 인사집행”을 사전에 차단하여 권력자의 인사전형을 막아 공정한 인사운용을 하였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좌부승지(정3품), 國子監大司成, 文翰學士에 올라 오늘날의 인적자원부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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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담공신도비

    어느 시대이건 조국에 해를 입히는 자가 있었다. 당시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고려인 홍다구는 개인적 원한으로 고려조정을 괴롭힌 인물이다.

    홍다구는 쿠빌라이에게 고려가 왜국과 相通한다고 하여 왜국 정벌을 주도하게 된다. 왜국 정벌은 여원연합군에 의해 1차(1237년)에 4만 병력과 9백여 척의 전함으로 출발하였고, 2차(1281년)에는 15만 병력이 나아갔으나 몽고군은겨우 3명이 살았을 뿐 모두 몰살되었으며 고려군은 당시 김방경 장군의 뛰어난 통솔로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공은 여원연합군의 대패와 비참하게 죽어간 군사들을 생각하여 마음이 아파 “바다 건너감을 슬퍼함”이라고 하는 詩 “感渡海(감도해)”를 지어 조국의 원수 홍다구 일당을 痛烈하게 비판 공격하였다.

    공의 나이 55세(1286년, 충렬왕 12년)에 知密直司事 監察大夫로 영진되어 政丞의 반열에 오른다. 감찰대부로 승차된 그 해 몽고국의 聖節을 축하하기 위하여 賀聖節使로 공이 원나라에 大使(대사)로 가게 된다. 공은 본디 성품이 강직하고 원의 복속국이란 치욕적인 국가 위치에 울분 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이 敵國 성절 축하사절 대표가 되었으니 마음의 病이 深化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밀직사란 왕의 명령을 대행하여 출납과 군기 등의 업무를 관장하는 곳이라, 이곳의 우두머리인 공의 公評正大한 업무처리로 볼 때 원나라 벼슬아치들에게 줄뇌물을 준비하지 않았을 것임은 자명하다.

     

    일찍이 공은 감도해란 시로 민족의 원수 홍다구 일당을 비판한 적이 있었는데 원에 가면 이들의 보복이 있을 것을 모를리 없는 공은 원의 나라에 가는 길이 험난하리라 고심하였을 것이다.

    원에서 홍다구 무리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고 부탁과 애걸을 하여야 할 것을 생각하니 憤痛(분통)이 터질 일이다. 공은 자신이 예측한 대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 도중에 맘의 病이 심화되어 향년 55세로 絶命하고 만다.

     

    아! 어찌 슬프고 분하지 않으리오. 공의 죽음에 대한 이견이 여러 가지이나 조국을 반역한 無道들의 치밀한 훼방이 어찌 없었겠는가! 공은 이러한 훼방의 산물로 분을 삭이지 못하고 타국에서 그 命을 다하였거나, 타인에 의한 殺害 등도 있었을 것임이 미루어 짐작이 간다. 공은 逝去한 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안장되었다가 지금의 청주시 명암동 약수터 후편에 이장하여 崇尙의 큰 인물로 現存하고 있다.

     

    3. 詩(시)에 대한 생각

    이 詩는 공이 한림원에 있을 때 연꽃이 피고 비가 올 때면 맨발로 우산을 들고 개성에 있는 龍化院 崇敎寺 연못으로 달려가 연꽃을 감상하면서 지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고려사 열전(列傳 권19, ‘郭預’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는 내용을 보면 “그가 한림원이 있을 때 매번 비가 오면(其在翰林院每雨中), 맨발로 우산을 가지고(跣足持傘), 홀로 용화지에 와서 연꽃을 감상하니(獨至龍化池賞蓮), 후세 사람들이 그 풍치를 높이어(後人高其風致), 그 일을 詩로 읊는 사람이 많았다.(多詠其事)”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은 文과 詩와 書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공이 산 시대는 안으로는 최씨 무인정권에 국정이 농락되고, 밖으로는 몽고의 침략으로 국가의 전 강토가 유린된 최악의 민족적 受難期였다. 공이 文 ‧ 詩 ‧ 書에 능한 三絶이라 하지만 그의 글이 많이 전해지지 않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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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益齋李齊賢은 그가 저술한 櫟翁稗說(역옹패설)에서 “公의 詩는 微妙하고도 婉曲하다”고 평하였다.

    공의 작품으로는 모두 상소문 1편, 시 13편이 東文選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 중 雨中賞蓮, 逸鷂, 感渡海 등이 일품이다. 공의 이 이야기는 풍류스러운일로 여겨져 후세의 많은 사람이 이를 소재로 하여 詩를 짓곤 하여 東國四詠 중의 한분이었다. 東國故事四詠이라고도 하는 東國四詠은 고려 시대를 대표할만한 풍류스러운 삶을 산 네명의 옛이야기를 지식인들이 詩로 읊은 것을 말한다. 이 동국사영에 포함되는 고사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金富軾(김부식)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나귀를 타고 江西寺의 승려 惠素를 찾아가서 忘形之交를 맺은 일을 말한다.

    두번째는 崔讜(최당)이 눈 속에서 소를 타고 海東耆英會 회원들과 함께 송도 근교의 皺岩(추암)을 찾아가서 놀았다고 하는 일이다.

    세번째는 鄭敍(정서)가 동래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거문고를 타며 戀君之詞인 “정과정’을 지어 달밤에 불렀다는 것을 말하며,

    네번째는 곽예(郭預)공이 한림원(별칭玉堂)에 있을 때 비가 오면 맨발로 우산을 쓰고 용화원 숭교사의 蓮池에 가서 연꽃을 감상한 것을 말한다. 이 네 가지 고사를 바탕으로 고려 후기 익재 이제현 이후 조선 초기 매월당 김시습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에 걸쳐 지식인 사이에서 꾸준히 한시로 창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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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담공 묘소

     

    공은 이 시에서 국가의 衰落함과 자신의 憂國의 심정을 28자 七言絶句에 哀切하게 그리고 있다. 비가 오면 용화원 숭교사의 연못가에서 맨발로 연꽃을 구경하며 피폐되고 힘 약한 나라와 무궁 순진한 백성의 장래를 걱정하곤 하였다.

    비바람 속의 연꽃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공의 태산같이 무거운 심정을 무엇으로 표시하리. 비바람은 곧 저 무지막지한 오랑캐 몽고의 조국강토 유린을 빗댄 것이고, 비바람이 아무리 세차도 굳건히 견디고 있는 연꽃을 고려 백성에 비유한 것이다.세찬 비바람이 지나고 나면 연꽃은 더한층 싱싱하고 예쁘게 피어날 것이다.

    그러나 연꽃이 활짝 피기도 전에 몸이 먼저 늙어 버렸음을 한탄하고 있다. 늙은 몸이 비바람을 막지 못함에 대한 심한 自愧之心을 시 속에 용해시킨 것이다. 이 얼마나 愛國志士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4. 끝말

    공의 人品은 평범하고 강직하지만 겸손과 따뜻한 심성을 가진 분이었다. 높은 지위에 있어도 거만하지 않고 항상 서민과 같은 삶을 살았다. 특히 공은 文章에 능하였으며 詩는 당대의 대문호 益齋 李齊賢, 졸옹 최해, 연흥군 민사평 등 많은 문인들과 交流하며 일대를 風味하였을 뿐만 아니라 書體는 힘이 있어 일가의 체를 이루어 많은 同 ‧ 後學 모두가 공의 서체를 배우고 臨書하여 書風의 변화를 主導하였다.

    공은 일반 백성의 고달픔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하여 농업, 축산 등 서민과 농민경제 發興을 위해 노력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실로 고려와 조선 양조를 통틀어 명실공히 實學의 先驅者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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